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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관리자
작성일 16-08-09 11:54 조회 3,480 댓글 0
 
10년 전 어느 겨울 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휴전선 철조망에 부딪혀 웅~웅~ 울음을 토하던 그 밤에 비무장지대(DMZ) 내 북측 심리전 제압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나는 목숨을 건 귀순 길에 들어섰다. 

북한군 GP(Guard Post)초소에서 한국군 GP초소는 뛰어서 5분,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 길은 북한에서의 스무 해가 넘는 내 인생을 뒤로하고 내딛는 길이었고 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어제의 동료(추격조)로부터 나를 지키는 AK자동소총뿐이었다. 

하나원에서부터 나는 ‘왕따’였다 

월남(越南)과 침투를 막으려고 DMZ에 설치한 1만 볼트의 고압 전기철조망과 지뢰를 비롯한 장애물, 촘촘한 매복호, 전방 탐지기기의 추적을 피해 마침내 MDL(Military Demarcation Line·군사분계선)을 넘었고 탈출 25분 만에 나는 한국 측 초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마도 한국에 들어온 2만7000명의 탈북자 중 최단 시간 내에 북한에서 한국으로 온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귀순은 사실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환경이 좋은 곳에서의 복무를 마다하고 DMZ를 선택한 것은 어린 나이였는데도 무력으로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북한 당국의 논리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출신성분이 우수하고 계급적 각성이 높은 자만 뽑혀오는 DMZ에서도 나는 심리전 제압 방송요원이라는 중요한 보직에서 근무했고, 적과 아군이 대치한 전초선이자 대북방송과 대남방송의 대결장에서 남북의 분단 상황을 6년간 목도했다. 

사선을 넘어 한국에 귀순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귀순용사가 아닌 탈북자,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탈북이주민 등 수많은 용어가 난무하는 탈출 이방인 대열에 합류했다. 정체성의 혼란과 상대적 박탈감 탓에 심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다른 탈북자처럼 경제적 어려움 탓에 탈북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끝없는 후회와 절망이 찾아왔다. 탈북자 정착기관인 하나원에서부터 나는 이른바 ‘왕따’였다. 특히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고향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내가 DMZ에서 근무한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이 소문나면서 탈북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트라우마가 반사적 분노로 표출돼 나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북한 주민의 탈북을 총으로 막는 국경 경비대원이 아니었는데도 북측의 DMZ를 지키던 군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공격하는 그들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원에서 퇴소해 먼지 가득하고 허름한 서울의 한 임대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지하철 타는 법도, 은행에서 돈 찾는 법도 모르던 터라 나는 차라리 외계인에 가까웠다. 어찌할 줄을 몰라 나를 담당한 형사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보자 “혼자서 새로 온 탈북자 40명을 담당하는데 그중 절반이 어르신이다. 젊은 너는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후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홀로 살아가야 했다. 

10년 만에 학사·석사·박사학위를 취득하다 

나는 북한에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다른 탈북자처럼 제3국에 체류하면서 시장경제를 터득한 것도 아니기에 한국 사회에 나온 지 두 달 만에 얼마 안 되는 정착금마저 사기를 당해 날렸다. 정착금을 빼앗아간 사람은 탈북자였고, 불량 휴대전화와 짝퉁 물건을 나에게 팔아 생계비를 빼앗은 이는 한국인이었다. 

생활비라도 벌려고 주유소에 찾아가 면접을 봤지만 대학생과 휴학생 구직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중국 동포보다 더 어리바리했던 나를 뽑아줄 리 만무했다. 목숨을 걸고 DMZ를 넘어왔지만 잉여인간으로 전락한 채 북한도 아닌 남한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굶어보았고 몸서리칠 만큼 힘든 상황을 하릴없이 받아들기에는 깊은 내상으로 인한 통증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상대적 박탈감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하루하루 폐인이 돼갔으며 5개월 만에 체중이 10㎏이나 줄었다. 그즈음에 정신적 좌절이 행동으로 발현되면서 극단적 선택도 수차례 했지만 용케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벼룩시장’의 구인광고를 통해 종로에 있는 일식당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배달과 주방 일이었는데 한국인이 8시간 일할 때 나는 12시간 일했다. 그럼에도 월급은 그들보다 적었다. 그때 처음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유 사회에 온 것은 맞지만 이 사회를 배우지 않고서는 평생을 열등한 타자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듯하다. 나는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대입학원에 등록했고 일이 끝나면 학원으로 갔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탈북자가 무슨 대학이냐고 빈정댔지만 나는 하루 3시간을 자며 일하고 공부했고 마침내 그해 가을 대학시험을 치러 합격통지를 받았다. 나는 북한에서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었다. 직업군인이 꿈이었던 나는 어려서부터 국방체육을 전공했고 수업에 참가하는 날보다 경기 일정으로 학교와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학교를 졸업하던 열일곱 살 나이에 곧바로 군에 입대해 6년간 DMZ 안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왔으니 학업의 공백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해야만 했다. 고려대 경영학과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동시에 합격한 나는 최종 선택에서 거주지에서 가까운 고려대가 아닌 연세대를 골랐다. 

그 이유는, 얼마 안 되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가 ‘분단의 사생아’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경영학을 공부해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목표도 가질 수 있었지만 정치학을 통해 설움 가득한 삶을 강요케 한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탈북자 최연소 박사, 1호 통일학 박사가 되다 

입학 전 들떴던 마음과 달리 대학 생활은 최악이었다. 남북한의 서로 다른 교육과정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취미는커녕 요령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혈혈단신이다보니 얼마 안 되는 생계지원금으로 집세를 내고 나면 교통비나 밥값도 남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첫 학기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탈북 대학생의 경우 사립대학 등록금을 국가와 대학에서 절반씩 장학금으로 지급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둬야 수업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 

성적이 나빠 장학금을 지원받지 못한 나는 스스로 등록금을 해결해야 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일식당과 건설 현장으로 일을 다녔다. 수업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일터로 가야 했던 대학 시절은 아직까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교재를 살 돈도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서 선 채로 책을 읽으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교재를 빌려보려고 6개의 도서관을 다닌 적도 있다. 책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닳고닳은 신발 밑창 값이 교재 값보다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험기간에는 일주일이나 열흘씩 아예 도서관 의자에서 자면서 공부했는데 군 시절에 체득한 인내심이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두 학기 등록금을 직접 내고서야 성적이 올라 장학금을 받았고 그제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친구를 사귀는 것만큼은 어려움이 없었던 나는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캠퍼스의 낭만도 만끽했다. 대학 3학년 때는 산악동아리를 맡아 이끌었고 학교 친구들과 민속문화반을 결성해 방방곡곡 돌아다녔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휴학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한 탈북 학생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실제로 졸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졸업한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나는 국회(국회의원 보좌관)와 두 곳의 대기업에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대학원에서도 한 번의 휴학 없이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22세 때 귀순해 10년 만에 탈북자 최초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아웃사이더의 정체성 찾기 

나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던 듯하다. 앞서 밝힌 것처럼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DMZ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 온 나에게 한국은 머리나 가슴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냉정한 자본주의 경쟁 사회였다. 나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어떤 사람들은 군인 출신이어서 국가적 대우나 보상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2000년 이후 군 귀순자에 대한 배려와 대우는 소멸됐고 오히려 군 출신 귀순자는 춥고 어두운 동면을 강요당했다. 첨언하자면 가지고 온 무기의 보로금(報勞金·반국가 단체나 그 관련 구성원으로부터 금품을 취득해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 제공했을 경우 금품 가격에 따라 국가가 지급하는 돈)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는데,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내가 가지고 온 무기(AK자동소총)는 동대문시장에서 25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언젠가 나는 탈북 학생들이 안보 강연이나 특정 재단의 지원으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충당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정작 군인 출신인 나에게는 그러한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혼자 지내다보니 탈북자 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어 내적 모순과 외적 도전을 함께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비록 아웃사이더의 위치일지라도 그 위치가 품은 다양한 면을 건전하게 고찰하고 정신적 인내를 배운다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탈북자에 대한 고리타분한 편견이 사회적 주홍글씨로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국회의 별정직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으로 일한 것은 귀순자에 대한 푸대접에 낙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대학 진학과 관련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내심을 갖고 위기를 기회로, 단점을 강점으로 바꾸려고 힘을 다했다. 나는 국회에 들어갈 때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정치외교학 전공자 모집에 지원해 채용됐고 두 곳의 대기업도 공채에 응시해 스스로의 힘으로 입사했다. 다만 서류 전형 때 탈북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자기소개서, 이력서 등에서 탈북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채용 면접 과정에서는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면접 때는 탈북자라는 사실이 합격에 오히려 도움을 준 것 같다. 밝히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탈북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력과 포부가 회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호소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입사 면접 상황을 즐겼고 예외 없이 합격통지를 받았다. 

내가 여러 회사에서 일한 이유는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미친 등록금’과 생활비 등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북한에 있을 때 ‘남조선’ 대학생들이 학비 낼 돈이 없어 피를 뽑아 팔아 등록금을 낸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실제로 겪어보니 등록금을 낼 수만 있다면 피를 뽑는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겠다고 수백 번 생각했다. 문제는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도 과연 등록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려운 형편이었어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위 과정을 빨리 마치고 기업에 취업해 돈을 번 후 상위 과정으로 나아가자고 마음먹었다. 남보다 일찍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남은 기간에 돈을 벌어 박사 과정에 입학했고 박사 과정 역시 빨리 끝내고 취직해 돈을 벌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박사 논문을 준비했다. 물론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했다는 게 아쉽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대기업 근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경력을 쌓은 것 역시 유익했다. 

살아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나는 한반도의 통일은 곧 분단의 극복이므로 분단을 사유하는 것이 통일을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정치학을 선택했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두 번 병원에 실려갔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도 있겠지만 남북한의 잔인한 분단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통일 후 통합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나의 심신을 해치곤 했다. 

남북한의 노력으로 70년 분단 상황을 끝장낼 수는 있지만 오랜 분단이 낳은 적대성과 이질성이 통일 이후에도 남북한 사람들의 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할 것이라는 생각에 못내 암울해진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후 과정 초청장이 왔지만 나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알고 지내던 지인이 부산에 대안학교를 세웠는데 사감 겸 교사로 일할 수 있겠느냐고 부탁해왔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어려워 월급도 없는 자원봉사라고 했다. 잠깐 고민했지만 흔쾌히 응했다. 

이 땅에서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봉사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아이들을 통해 통일 후에 대한 희망을 찾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생각해보면 살아야 하겠다는 절박함이 DMZ를 통한 귀순 길에서 생존이라는 기적을 가져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간절함이 빈한한 처지에서도 내가 지금까지 버텨온 의지의 원천이자 자양분이었다. 

나는 지금 또 다른 오기와 소망의 절박함과 간절함 앞에 서 있다. 그것은 통일이다. 다가오는 통일은 적대와 증오를 배태해온 70년 분단사(史)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을 형태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 통일이 남북한 주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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