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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다!" [탈북여성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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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관리자
작성일 16-08-09 11:43 조회 3,111 댓글 0
 
2003년 6월, 세 딸을 남겨두고 북한을 떠났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량강도엔 ‘중국에 가서 3개월만 일하다 오면 장사밑천은 넉넉히 벌어올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나는 그 소문의 한 끝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냥 앉아서 굶어죽을 수만은 없다는 결심이었고 딱 3개월만 일하고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울며불며하는 애들과 헤어졌습니다. 당시의 제가 애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란 남은 재산을 탈탈 털어 마련했던 안남미 쌀 7㎏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두만강을 건너 내가 찾아간 중국은 ‘3개월 만에 장사밑천’을 잡기는 고사하고 제 몸 하나 간수하기조차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짐승처럼 팔려 다녀야 했고 중국공안의 눈을 피해 인적 없는 산골짝에서 1년여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다보니 집을 떠난 지가 벌써 2년이 되었는데 내 손엔 단돈 백 원도 쥐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인신매매꾼들의 촉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되던 시점부터 한국에 올 때까지 2년6개월간 하루도 쉬지 않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 식당에서 죽기 살기로 일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얼마간 돈이 모아져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때, 저와 같은 처지에 있던 한 탈북여성을 만났습니다. 내가 북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안 그 여인은 대뜸 치마를 내리고 자신의 하체에 생긴 커다란 흠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돌아간다는 건 미친 짓이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인은, 중국에서 번 돈을 가지고 북으로 갔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설마 죽이지야 않겠지~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갔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른 새벽에 보위지도원이 집으로 들이닥쳤고 그 후로 노동단련대와 감옥에서 죽을 고생을 경험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인은 “항문까지 벌어져 다 죽게 된 나는 시체처럼 거적에 말려 감옥 밖으로 던져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헤아릴 수도 없다는 이야기까지는 그냥 그러러니 하고 들었는데 “항문은 물론 음부에까지 손을 넣어 숨겨둔 돈이 없는가를 살피고 ‘중국에서 번 돈은 법을 어기고 번 것’이기 때문에 일전도 본인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선 마음을 고쳐먹고 말았습니다. 

돈을 빼앗다니, 그럼 내가 이곳 중국 땅에서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 받았던 수모와 멸시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텐가. 아니, 수모와 멸시는 나 혼자만의 가슴에 꼭꼭 묻어둔다고 해도 이 못난 엄마를 기다리며 몇 날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어린 딸애들은 또 어떻게 바라본단 말인가...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심했고 지도를 펼치고 중국에서 라오스로, 라오스에서 또 다른 3국을 경유해 대한민국으로의 마지막 귀착지인 태국에 도착했습니다. 

중국어는 물론 영어한마디 번지지 못하는 제가 단신으로, 그것도 여성의 몸으로 5천키로나 되는 탈출을 감행해 대한민국 영사관에 왔다는 사실을 처음엔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혹시는 가족이, 때로는 남자가 그 먼 길을 에돌아 자유를 찾았더라는 이야기는 들은바 있지만 여자 혼자서, 안내인도 없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던 해당국 난민관계자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겐 딸이 있습니다. 그것도 세 명씩이나요. 굶어죽게 된 자식을 세 명 씩이나 둔 엄마가 두려 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 * * 

대한민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 혼자서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까지 왔다는 사실이 못미더웠는지 조사기관사람들이 여러 번 탈북 동기며 탈출경로를 물어보았고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고 머리를 기웃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제 소지품에서 나왔던 세 개의 금가락지는 같은 탈북자들까지도 저의 탈북행위에 의심을 품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가 조사관이라고 해도 '장사밑천을 잡으려 중국으로 나왔었고 돈을 벌지 못해 3년6개월 만에 남조선으로 왔다‘는 말을 믿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더욱이 금붙이까지 몸에 지닌 사람이 안내인도 없이 중국과 라오스 등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저는 소지품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금붙이 몇 개를 들고 담당조사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죽을 고생을 하며 단신으로 대한민국까지 왔는가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 드렸습니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고 입을 연 저는 손가방에서 물 낡은 사진과 편지 한 장을 꺼내 놓았습니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고 한국행을 결심하면서 딸들에게 보냈던 편지에 대한 회신이었습니다. 

어느 옛날에 찍었던 사진과 함께 큰애가 써 보낸 편지였는데 너무나 자주 읽어서 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보풀이 인 편지였고 안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 보고 싶어요. 얼마나 보고 싶은지 엄마만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나요. 옥이는 벌써 아홉 살이 되었는데 혹시라도 엄마가 밤에 오면 어쩌는가 며 대문을 꼭꼭 열어놓군 해요. 낮에는 우리 식구 모두가 밥 빌어먹으려 시장으로 나가기 때문에 엄마 말씀대로 문을 꼭꼭 잠그고 나가지만 돌아와서는 아무리 무서워도 문을 열어 놓는답니다.” 

“...그래도 엄마. 돌아와서는 안돼요. 며칠 전에도 3작업반에 살던 순이네 엄마가 중국엘 갔었다는 게 들통 나는 바람에 어디론가 끌려갔어요. 그래서 순이는 학교도 못 나와요. 매일처럼 울고 있는 순이를 보면서 난 차라리 지금처럼 우리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게 낳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옥이도 엄마가 보고 싶지만 감옥 가는거 보다 돈 버는게 더 좋다고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 엄마 우리걱정은 하지 말고 그곳에서 잘 지내세요. 꼭요!” 

방안엔 침묵만 감돌았고 사진과 편지를 다시 가방에 담으며 저는 말했습니다. “원래도 그랬지만, 그 편지를 받는 순간부터 저는 남은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내가 살고 애들이 사는 길은 여기 한국으로 오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라고 그 험난한 여정에 나를 위해 한 푼이라도 쓰게 될까봐 중국에서 벌었던 돈을 모두 여기 금붙이와 바꾸었구요” 

* * * 

이 작은 보물들을 꼭 사랑하는 세 딸애의 손에 끼워주리라 결심하고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1년은 중국에서 면식을 익혔던 교포여성과 함께 건설현장에서 철골을 나르는 등의 허드레 일을 했고 2년차에 접어들어서는 건설현장의 식당주방에서 그릇 가시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렇게 천만 원을 모아 애들을 데려올 ‘밑천’을 마련했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애들을 생각하면 하루 한시가 급한데 이렇게 벌다보면 언제 세 아이를 다 데려올 수 있을까 싶어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고 그래서 들어간 곳이 강남 어느 병원의 간병인 자리였습니다. 

처음엔 환자와 나사이의 소통이 문제였고 때로는 의사선생님의 지시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소통은 하면 되는 것이고 의사선생님의 지시는 반복해서 듣고 따르면 그만이었습니다. 남북한이 아무리 다른 제도라 할 지라도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인데 내가 무슨 별나라에서 왔다고 소통이 문제가 되겠는가고 스스로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환자들에게서 매일처럼 받아내는 대소변도 생각하기 나름이었습니다. 나는 나대로 아픈 사람을 돌보고 이런 순간들이 모여 딸자식을 데려올 기회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대소변이 그냥 대소변이 아니라 생명수처럼, 때로는 순금처럼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어느날, 월급 타는 날이라고 모두들 기뻐하는데 병동 한구석에 말없이 서있는 저에게 내가 담당한 환자의 부인이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가고 다정히 물어왔습니다. 

아무생각 없이 “딸애를 데려오려면 아직 돈이 부족해요”라고 대답하고 나서 하던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데 다시 부인이 다가와 제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부족한데요?” 

“3백 만원이요” 
“그럼 어떻게 딸들을 데려오나요?”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밤새 계속되었고 이튿날부터 저는 ‘북에 남겨두었던 세 딸을 데려올 작전’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가 2년 반 동안 모은 돈에 엄마(이후로 저는 부인을 엄마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그때까지 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요!)가 보태준 돈 3백만 원을 어느 브로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꼭 6개월 만에 12살, 16살, 19살 먹은 세 딸이 꿈속에서처럼 저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하나원 면회실에서 엄마를 외치며 품에 안기던 애들 앞에서 그동안 참고 참아온 눈물을 마음껏 쏟으며 한 애 한 애의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애들아, 엄마가 정말 미안해. 내가정말 잘못했다. 에미가 되가지고 그 험한 세상에 너희들을 내 놓았었으니 정말 할 말이 없다. 영심아, 순희야, 옥이야! 엄마가 정말 미안해 응?! 용서 할거지?” 

그러는 저에게 목을 꼭 그러안고 매달려 있던 막내 옥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났으면 됐어. 살아서 만났잖아. 돈 벌러 갔다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치 언니?”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그 모진 세월을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이 얼마고 헤어져 사는 사람이 또 얼만데...

죽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 만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열심히, 그리고 죽기내기로 잘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 우리 온 가족이 모여서 산 세월이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큰 딸애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 회사의 신입사원이 되었고 둘째와 셋째는 대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엄마의 도움으로 금융설계업체의 금융 강사가 되었습니다. 

이 꿈같은 일들은 모두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누리는 이 모든 행복역시 탈북민들에 대한 대한민국국민들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천지가 열백번 뒤집힌다고 해도 대한민국은 우리 가족의 조국입니다! 이곳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간다는 긍지를 안고 내일도 모레도 열심히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여기서 저의 이야기를 마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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