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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정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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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관리자
작성일 15-02-10 23:56 조회 3,131 댓글 0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탈북자들의 숫자는 날을 따라 증가하고 있다.


2만 8천여 명중에는 국회의원부터 박사, 의사, 교사, 자영업자들 그리고 꾸준히 회사에서 수년간 일하는 사람들까지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언어도 모습도 같은 사람들 속에서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한시도 태어난 고향과 부모형제를 잊지 않고 통일을 그리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성공사례 편집자주


내 인생에 정년은 없다.


이영선 어머니의 하루 출근은 아침 7시30분이다. 새벽같이 밥을 지어 집에 함께 살고 있는 환자의 아침식사를 차려주고 또 다른 환자를 돌보러 간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집으로 와서 점심식사를 차려드리고 약을 챙겨드리고 다시 환자의 집으로 가고... 그렇게 주중에 일하고 주말이면 집에서 돌보고 있는 환자와 함께 교회로 간다.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하루 8시간이지만 하루 24시간이 아닌 25시간로 살아가는 영선 어머니의 직업은 요양보호사이다. 요양보호사로 일해 온 지난 7년 간 하루도 쉬지않고 그렇게 지국정성으로 일해 왔다.


모습도 목소리도 평범하지만 살아가는 그 모습만은 평범하지 않은 그분을 통해서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그 말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함경북도 나선지역에서 잘나가는 직업에 종사했던 영선 어머니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둘째 딸 때문이었다.


1990년대 후반, 비사(비사회주의 그루빠)가 들이닥친 나선지역에서 힘 없고 백 없는 많은 사람들은 결코 그 바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시 중국인 사장 밑에서 일 했던 또래 친구와 함께 보안서(당시 안전부)로 끌려간 어머니의 둘째 딸은 각각 다른 감방에서 열흘 넘게 취조 받고 형이 내려졌는데 그게 바로 1999년 11월 19일(사회안전절) 바로 전날이었다.


전날 저녁에 안전부에 가서 딸과 친구를 데리고 집에 왔는데 하루만 말미를 받은 터라 시외에 집이 있는 딸 친구도 미처 집에 갈 사이 없이 하룻밤을 영선 어머니네 집에서 묵게 되었다.


밤을 새며 딸을 부둥켜안고 울던 어머니가 아침에 직장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큰 딸한테서 안전부에서 동생과 친구를 찾느라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취를 감춘 딸은 친구와 함께 두만강 인근에 살던 친척을 찾아 탈북을 강행했고 큰 딸마저 중국에 물건 넘기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불과 2년 사이에 일어난 이러한 일로 마음을 졸이던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만이라도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직장을 그만두고 재혼을 이유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 앉고 딸과 연락이 닿아 2006년 5월에 두만강을 건넜고 9월에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됐다.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65세였다.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직업문제였다. 정말 하루도 쉴 새 없이 직장생활에 전념해 온 어머니는 몸이 건강한데 무슨 일인들 못할까 하는 생각에 서울에 집을 배정받은 다음날부터 길가의 생활정보지 신문을 훑고 심지어 가까운 지하철에 나가 무료신문까지 들고 와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주변에 살고 있던 두 딸은 이젠 나이도 있고 또 집에서 쉬어도 생계보조금으로 살 수 있다고 어머니를 만류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북한에 남겨두고 온 아들이 있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함께 떠날 수 없었지만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찾은 직업이 아파트 청소원이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정말 열심히 일했다. 몰라보게 깨끗해지는 복도와 현관 등 아파트내부를 보며 주위사람들이 권했다.


“적은 월급에 이렇게 힘든 일을 하지 말고 아줌마 같으면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을 거 에요.”


주위사람들의 권고도 권고지만 정말 나이만 아니면 더 어렵고 힘든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에 정착한 지 3년이 되는 해, 그때까지만 해도 간병인(요양보호사)이라 불리던 그 일을 하게 된 어머니는 65만원이었던 청소원 월급에 비해 배로 많은 월급에 간병인을 택했다.


영선어머니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가녀린 몸에 어디서 그럼 힘이 나오냐며 놀란다.


요양보호사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중증 환자들을 돌보는 직업이라 결코 마음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따야만 할 수 있다.


낮에는 일하고 환자들이 잠든 밤시간을 이용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자격증시험에도 합격했다.


한 요양병원에 취직해 한 개 호실 6명의 환자들을 맡았는데 병원에서는 물론 드문히 면회 오는 가족들까지 어머니의 정성에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일 년 쯤 일했을 때 함께 일하던 동료가 요양보호센터를 차렸고 어머니도 역시 집 가까운 쪽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새로 옮긴 센터에서 처음 만난 환자가 바로 지금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김 할머니이다.


그런데 몇 달 지나지 않아 환자의 보호자가 할머니를 요양보호시설로 보내겠다고 센터에 연락을 해왔다. 김할머니는 당시 심각한 치매증상을 보이고 있었고 보호자인 아들부부도 맞벌이 하면서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으로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처지가 안쓰러웠던 영선어머니는 센터장에게 자기 집에서 돌보면 안되겠냐고 조심히 물었고 센터장의 거듭되는 설득에 아들부부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당시 김 할머니의 몸무게는 32키로, 영선 어머니는 할머니를 업고 집까지 왔고 그날부터 김 할머니는 영선 어머니와 가족이 되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환자에게 필요한 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김 할머니는 밤중에 한 시간이 멀다하게 화장실을 가는 습관이 있다.


낮엔 낮대로 환자를 돌보고 밤에 지쳐 잠자리에 들라치면 할머니가 또 부스럭 부스럭 잠을 깨웠다. 하지만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 건강이 안좋은 초 시기 김 할머니는 죽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밤 새워 사골을 우려 그 국물에 찹쌀로 죽을 쑤어 한가락씩 직접 식사를 시켰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영선어머니는 항상 밥을 두 사람 몫을 따로따로 짓는다.


김치를 해도 삶은 무김치를 따로 담그고 밥상을 차릴 때는 배추김치를 환자가 넘기기 쉽게 잘게 썰어서 놓아드린다.


정성이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했든가? 날마다 눈에 띄게 김 할머니의 건강이 좋아졌다.


그런데 건강이 호전되어 가면서 한 가지 근심이 생겼다. 혹시라도 손님이 와서 식사하셨냐고 인사삼아 말을 건네면 김 할머니가 무조건 못 먹었다고 하는 것이다. 영선어머니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매 한가지였다.


이사람 저사람의 입을 통해서 영선 어머니가 집에까지 환자를 불러들이고 식사도 제대로 대접 않는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치매환자라면 그 누구에게나 흔한 일이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곧이 고대로 믿고 입방아를 찧었다.


처음에 어머니는 너무 황당하여 야단도 쳤지만 심지어 어머니 앞에서까지 천진하게 쳐다보며 밥 좀 달라고 손 내미는 할머니를 대하고서는 마음을 돌렸다.


드문히 주말에 집을 찾는 딸들이 어머니에게 뭐라고 할라치면 도리어 딸들을 탓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니 환자의 건강상태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2층에서 아래층까지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산책까지 다닐 수 있게 건강이 호전되었다.


처음에 탈북자 출신 간병인이 못미더워 망설이며 노모를 떠밀었던 아들내외는 몇 개월 후 어머니의 집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환자는 놀라는 아들내외를 외면하면서 무작정 안가겠다고 어머니의 팔을 붙
잡았다. 그렇게 눌러앉은 김 할머니는 지금 몸무게 52키로 정상체중으로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요즘 김 할머니는 동네 노인정에도 출입하고 있는데 혹시 못나가는 날이면 노인정의 음식을 집에까지 날라 오는 친구 할머니도 생겼다.


김 할머니의 건강이 호전되자 어머니는 또 다른 환자를 맡기로 하였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지금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자면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운전면허시험에 도전했다.


원서를 접수하던 면허시험장 직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그 연세에 도전 한 번 해보시는 겁니까?”
“도전이라뇨? 일하는데 차가 필요해서요.”


그때 어머니의 나이가 68세였다.


이론시험은 단번에 합격했고 도로주행도 두 번 만에 합격해 드디어 운전면허자격증을 취득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길로 작은 사위를 데리고 자동차매매시장으로 달려가 3백만 원짜리 소형차를 구입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폐차장으로 갈 쓸모없는 물건으로 보였을 그 차는 얼마 전 까지 어머니와 함께 수 백키로를 달려왔다.


김 할머니가 영선어머니의 집에 온지도 7년 세월이 되었다.


요새는 영선어머니가 바쁜 날이면 김 할머니는 집 청소도 맡아하고 심심찮게 말동무도 되어준다.


김 할머니는 일 년에 설날이나 추석 같은 때 노모를 보기 위해 아들내외가 영선어머니네 집에 찾아오면 혹여 집으로 가자거나 요양시설에 보낼 기미를 보일까 급히 동네 집에 피신하기도 한다.


영선어머니와 김 할머니와 함께 길에 나서면 영락없는 친구사이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로 김 할머니가 78세, 영선 어머니는 74세이다.


몇 년 전 요양보호센터에 취직하면서 영선 어머니는 65세 이상이면 그 누구나 국가에서 받을 수 있는 정부혜택도 마다하고 당당하게 4대보험에 가입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렇게 열심히 번 돈을 북한의 아들며느리를 위해 보내주고 또 올해엔 장애인 조카와 동생도 데려왔다.


곁에서 누군가가 영선 어머니에게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하겠냐고 물으면 건강히 허락할 때까지라고. 아직 10년은 문제 없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작년에 영선 어머니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조직한 요양보호사 초청모임에 초대 받고 사례 발표를 하고 상까지 받았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일을 그만 둘 수 없다는 영선 어머니를 통해서 인생의 정년은 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길을 가는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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